김종민 의원의 정치행보를 쫓아가다 보면 더불어민주당이 겪었던 질곡의 시간들과 마주할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차기 대통령감으로 떠오르던 안희정 충남지사의 낙마가 아닐까 싶다. 실용적인 중도 성향의 김종민은 나름의 유머도 갖추고 있어 생각보다 그 존재감이 크다. 그의 프로필과 원칙과상식, 새로운미래 탈당 등에 관해 알아보자.
김종민 국회의원 프로필, 원칙과 상식, 새로운미래 탈당
김종민(1964년)은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며, 대학 재학 당시 안희정과 함께 학생운동을 했다. 옥고까지 치렀을 정도니 진성 운동권이라 할 수 있다. 이후 내일신문, 시사저널 등에서 정치부 기자활동을 했으며,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자 안희정의 추천으로 청와대에 들어간다. 홍보기획비서관실 행정관, 역대 최연소 청와대 대변인, 국정홍보비서관 등을 역임하며, 정권 내내 신임을 받았다.
2010년 5회 지방선거에서 안희정이 충남지사로 당선되자, 정무부지사로 임명된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민주통합당의 공천을 받아 논산시·계룡시·금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지만, 이인제 의원에게 패배하고 만다. 잠깐 정치 휴지기를 갖는가 싶었지만, 2014년 6회 지방선거에서 안희정 캠프 선대본부장으로 화려하게 컴백한다. 이를 계기로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 부의장에 임명되면서 당 지도부에 본격적으로 진입하게 된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해서 이인제를 꺾고, 의원으로 당선됐다. 이인제는 당적을 수시로 바꿨던 탓에 철새 정치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충청도를 대표하는 대선주자급 인물이었기 때문에 김종민은 인지도를 단번에 높일 수 있었다. (반면, 이인제는 6선의원에 도달하기까지 엄청나게 질긴 생명력을 보여 피닉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의 패배로 인해 사실상 정계 은퇴하게 된다.)
2018년 3월, 안희정이 성폭력과 관련된 의혹에 몰렸다. 정무비서로 근무하던 김지은이 이를 폭로하고, 검찰에 고소했다. 이와 관련해 여러 가지 이견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징역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렇게 허무하리만큼 순식간에 안희정의 정치생명은 끊어졌다. 친노계의 입장에서는 유망 대권주자를 잃은 셈이었으며, 김종민의 입장에서는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정치적 후견인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김종민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도 같은 지역구에서 당선됐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그동안 3번의 총선을 치르는 동안 실시됐던 출구조사 결과 모두가 틀렸다는 점이다. 19대 총선에서는 김종민의 승리를 예측했지만 낙선했던 반면, 20~21대 총선에서는 패배가 예상됐음에도 불구하고 당선됐다. 그렇게 재선의원의 고지에 오르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당내 역학구도가 좋지 않았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너무나도 맥없이 이재명 전지사에게 밀렸던 것이다.
김종민은 엄밀하게 말해 안정희계다. 하지만 초록은 동색이라고 친노계, 친문계, 친낙계와 뿌리가 동일한 만큼 비명계라는 이름 하에 함께 움직였다. 친노계는 적장자라 할 수 있는 안정희이 구속됐기 때문에 사실상 폐문당했으며, 친문계는 제대로 된 후계자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나마 친낙계에 이낙연이라는 대권주자급 인물이 있었지만, 당권경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렇게 비명계에 그 어떤 구심점도 없었던 까닭에 이재명 일극체제가 완성됐던 것이다.
이는 21대 국회 전반에 걸쳐 펼쳐졌던 일이다. 당 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비명계라고 드러내놓고 밝힌 의원은 5명(김종민, 윤영찬, 이상민, 이원욱, 조응천) 밖에 없었다. 이들은 비주류인 동시에 이재명을 향한 쓴소리를 했기 때문에 여러모로 20대 국회의 조금박해(조응천, 금태섭, 박용진, 김해영)를 연상시켰다. 이중에 이상민 의원은 국민의힘으로 넘어갔으며, 나머지 4명의 의원들은 원칙과상식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다.
이후 원칙과상식은 탈당을 결의하는 듯싶었지만, 윤영찬 의원이 당내 잔류를 결심하면서 나머지 3인방만 신당설립에 나섰다. (참고로 윤영찬이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공천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과 함께 친문계의 끈질긴 요구가 있었다는 점이 유력해 보인다.) 당명은 미래대연합으로 결정했으며, 통합을 염두에 둔 탓인지 이낙연이 이끄는 새로운미래와 발을 맞췄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김종민 의원만 새로운미래에 합류했다.
이원욱, 조응천 의원은 개혁신당 입당을 결정했다. 이후 제3지대는 빅텐트를 치는 데 성공하지만, 화학적인 결합에 실패하며 불과 며칠 만에 다시 분당을 하게 된다. 그렇게 제3지대는 2024년 22대 총선에서 폭망했다. 개혁신당은 겨우 3석을 확보했으며, 새로운미래는 어부지리로 김종민이 1석을 얻은 것 외에는 성과가 없었다. 실제로 어부지리라는 말이 딱인 게 김종민은 지역구를 옮겨 세종시(갑)에 나섰는데,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공천이 급작스럽게 취소되는 바람에 얻어낸 당선이었다.
이후 윤석열 정권에서 그를 정무특임장관으로 임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참고로 정무특임장관은 행정부 산하가 아닌 국무위원이라 영향력 자체는 제한적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양정철 전 민주연구원장과 친한 만큼 친노계 인사들을 쓰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친노계 중에서는 중도에 가까운 김종민이 그 역할을 맡기에 딱이었다. 하지만 낭설에 불과했는지 입각은 되지 않았다. 2024년 9월 김종민은 새로운미래를 탈당했으며, 원외정당이 된 새로운미래는 새미래민주당으로 당명을 교체하는 등 정비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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