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는 합의정신에 의해 작동해야 된다. 아무리 진영 간에 다툼이 치열하게 펼쳐지고 있는 게 작금의 현실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신뢰마저 무너져서는 안된다. 하지만 지난 2024년 9월에 있었던 인권위원 지명과 관련된 표결에서 야당몫의 후보는 가결된 반면, 여당몫의 후보가 부결되는 촌극이 발생했다. 인권위 여당몫 인권위원 후보의 부결사태에 관해 알아보자.
국가인권위원회 여당 몫 인권위원 후보 부결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전담기구로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마찬가지로 대통령의 업무지휘를 받지 않는 독립 행정기관이다. 국가인권위원장은 장관급 대우를 받으며, 11명의 위원들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한다. 나머지 10명의 위원은 3명의 상임위원과 7명의 비상임위원으로 구분되는데, 여기서 포인트는 지명권자가 누구냐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지명권자
· 위원장(1) : 대통령(1)
· 상임위원(3) : 대통령(1), 국회(2)
· 비상임위원(7) : 대통령(2), 대법원장(3), 국회(2)
대법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기 때문에 사실상 한편이라 할 수 있으며, 국회 몫으로 배분된 2명은 여당과 야당 교섭단체인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에게 지명권이 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야당 몫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위원은 최대 2명이라고 보는 게 맞다. 애초에 설계 자체가 여당이 주도할 수 있게 설계됐다는 뜻이다.
지난 2024년 9월, 국회 몫으로 지명됐던 2명의 인권위원이 임기가 끝남에 따라 다시 추천에 들어갔다. 배준영 국민의힘 원내수석부대표와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원내수석부대표는 각자의 후보가 누군지, 그리고 본회의 표결이 언제 이뤄질지 협의를 사전에 마쳤다. 하지만 이렇게 지도부 간에 교섭이 끝난 상태에서 표결이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여당 몫의 후보였던 한석훈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가 부결됐다.
이런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아무런 통보받지 않았던 국민의힘 입장에서는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결과가 나오자 국민의힘 의원들은 사기꾼을 연호하며 정회를 이끌어냈다. 여러모로 국민의힘의 입장에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의힘 의원들 대부분이 야당 몫의 후보였던 이숙진 전차관을 가결하는데 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불어민주당은 왜 부결에 나섰던 것일까? 본회의에 들어가기 앞서 펼쳐진 의원총회에서 서미화 의원이 한석훈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의사를 표명했다고 한다. 이전에 비상임위원을 맡은 적이 있었던 서미화의 경험담이 전해졌던 것 같다. 문제는 지도부가 그 어떠한 가이드를 잡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의원들 개개인의 소신은 굉장히 존중받아야 맞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앞으로 그 어떤 정당이 더불어민주당과 합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즉, 언제든 뒤통수를 치고, 합의를 깰 수 있는 정당으로 낙인찍혔다는 것이다.
최소한 본회의 표결 전에라도 의총에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음을 국민의힘에게 알려주지 않았다는 점도 굉장히 아쉽다. 물론 의석수에서 과반을 넘게 차지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에게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겠지만, 최소한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지도부와 의원들의 의견이 언제나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그러니 좀 더 괜찮은 후보를 추천했어야 된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협의하는 단계에서부터 한석훈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어야 맞다. 막말로 국민의힘 입장에서도 이숙진이 결코 괜찮은 후보라서 가결표를 던졌던 게 아니다. 실제로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이 이숙진에 대한 강력한 비토를 했지만, 배준영이 이미 당대당 합의가 끝난 만큼 대승적인 차원에서 이에 동의해 달라고 이들을 설득했다고 알려진다. 그랬기에 국민의힘 의원들이 이숙진에게 몰표를 던졌다고 보면 된다.
더욱 아쉬운 점은 이런 말도 안되는 촌극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박성준과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보여준 뻔뻔한 태도였다. 최소한 지도부만큼은 부결이 된 것에 대한 유감을 표명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대뜸 인권위원 표결과는 전혀 상관없는 윤석열 정권에 대한 비난에 나서며,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여줬다. 합리적인 중도의 입장에서는 매우 비합리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렇게 더불어민주당이 다수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을 찍어 누르는 모습을 계속 보여준다면, 집권여당이 되는 게 절대 불가능해진다.
진보진영의 가장 큰 문제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절차적인 공정성이 매번 처참할 정도로 무너지고 있다. 심지어 이번 부결이 그 어떠한 실효성이 없다는 관점에서 훨씬 더 한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인권위 규정에 따르면 위원의 임기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후임자가 없을 경우에는 직무를 계속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의힘이 한석준의 재임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부결시킨 것이다.
따라서 의도치 않게도 한석준이 계속 인권위원을 맡을 수 있는 길을 다른 방식으로 열어주게 됐다. 결국 더불어민주당은 뒤통수치는 정당이라는 오명은 오명대로 뒤집어쓰고, 한석준이 인권위원으로 일하는 것도 막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윤석열에 대한 국정지지율이 20%를 오가는 최적의 상황에서 조차 채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을 제대로 통과시키지 못하는 무능한 정당으로서의 모습이 또다시 드러났던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김건희 리스크로 허우적대고 있는 국민의힘이라고는 하지만, 이들은 교섭단체로서 엄연한 협상 파트너다. 그냥 법대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민주주의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애초에 법이라는 것은 절대 완벽할 수 없다. (이는 김건희 명품백 수수의혹만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이렇게 되면 앞으로 윤석열이 거부권을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대통령의 거부권 역시 헌법에서 규정짓고 있는 고유권한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사태를 지켜보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수권정당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국민들이 입법부와 행정부 권력 모두를 이렇게나 폭주하는 정당에게 몰아줄 리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조그만 문제조차 합리적으로 협치하지 못한다면, 국민의힘 소장파 의원들이 굳이 움직일까 싶다. 이러니 더불어민주당이 채상병 특검법과 김건희 특검법을 통과시킬 맘이 애초에 없었다는 루머가 계속 나오는 것이다. 어떻게든 통과시키려고 마음먹었다면, 좀 더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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